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슘슈 섬 전투 (문단 편집) == 그 이후 == 일본 제국 제11전차연대가 참전했던 곳으로서 그 당시 격파된 일본 전차들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다. 이들은 반약한 전력으로 그나마 전과다운 전과를 보여준 정말 몇 안되는 일본군 전차 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을 딴 [[육상자위대]] 전차대대가 홋카이도에 주둔하고 있다. 소련의 공세로 정복된 사할린과 쿠릴은 소련 시대를 거쳐 현재에도 러시아령이다. 수비대였던 91사단소속장교 한 사람이 후에 남긴 증언을 보면 바로 [[항복]]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섬에 있는 [[정신대]]원들 포함 1,200여 명의 [[여성]] 비전투원들이 [[소련군]]에게 [[강간]]당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.[* 실제로 [[만주 작전]]에서 [[일본인]] 여성들이, [[독소전쟁]]에서 [[베를린]]이 소련군에 의해 [[베를린 공방전|함락]]된 후에, 수많은 [[독일인]] 여성들이 소련군 병사들에게 [[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|강간을 당한 바가 있다]]. 또한 소련의 [[한반도]] 진주 당시에도 [[38선]] 이북의 많은 [[조선인]]들이 소련군에 의해 [[학살]], 강간당한 바 있다. 괜한 우려는 아니었던 셈이다.] 그래서 수비대는 시무슈에 있는 배란 배는 모두 긁어모아서 어선을 개조한 구잠정 2척과 100톤 미만의 소형 범선 9척으로 선단을 편성하고 18일 밤에 이 비전투원들을 여기다가 태워서 홋카이도로 탈출시켰고, 정비병과 사병들도 가능한 배편과 비행기를 이용해서 내보냈다. 남은 [[장교]]와 [[하사관]]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[[시베리아]]로 갔다. 다만, 마지막까지 일본 제국은 남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을 내팽개친 것과 마찬가지로 쿠릴 열도 일대에서도 일본 본토 출신 장병들만을 탈출시키고 [[아이누족]] 출신 병사들은 버려두고 철수하여 이들은 소련군의 [[포로]] 신세가 되었다. 일본은 쿠릴 열도 및 남사할린에서의 전투에서 [[옥음방송]] 이후임에도 생각보다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 소련군의 압도적인 무장공세 및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인한 일본군 내 전투 의지 상실이 겹쳐 패배하였고 그 결과 이 일대를 영영 잃게 되었다. 다만 일본 입장에서도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에서의 분전은 의외의 수확을 안겨다 주었는데 바로 소련의 대일전선 최종 목표였던 [[홋카이도]] 분할 점령을 좌절시켰다는 점이다.[* 소련은 홋카이도를 굉장히 탐냈는데 이는 우선 사할린과 쿠릴 열도보다 온화한 홋카이도를 통해 안정적인 부동항을 영유할 수 있었고 전후 일본과의 물리적인 접경을 통해 동아시아내 공산주의 확장에 있어서도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. 또한 너무나 면적이 좁은 쿠릴 열도 및 [[포츠머스 조약]] 이전 본래 러시아령이었던 남사할린과 달리 홋카이도 북부는 유럽 전선에서의 [[칼리닌그라드]]와 마찬가지로 소련 입장에서 확실하게 노획할 수 있었던 [[추축국]]의 본토이자 대국민 선전용 전리품이 될 수 있었다.] 실제 소련은 일본군 기지와 거리가 있는 [[루모이]]에 상륙해 기습적으로 홋카이도를 동서로 횡단, 루모이-[[쿠시로]] 선으로 홋카이도를 반분할 계획이었다. 그러나 슘슈 섬의 분전은 소련군의 상당한 병력 손실 및 전투 일정의 지연을 야기했고 사할린 방면에서도 본래 홋카이도 기습 침공을 위해 22일 이전까지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오도마리(현 [[코르사코프]])를 25일에서야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. 결국 소련은 이러한 상황이 미국의 격렬한 반대와도 맞물려 홋카이도 상륙 작전을 포기했다. 미주리 함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리는 9월 2일 이전까지 홋카이도를 분할 점령해야 했던 소련으로서는 쿠릴 열도 및 남사할린에서의 작전 지연이 미국의 반대와 더불어 홋카이도 침공 계획을 좌절시킨 주요 원인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